2026/08 22

파리대왕 (봉화, 집단심리, 짐승의 정체)

무인도에 떨어진 아이들이 처음 한 일은 놀라울 정도로 어른스러웠습니다. 규칙을 정하고, 대장을 뽑고, 구조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이 머릿속에 걸렸습니다. 과연 내가 저 섬에 있었다면, 끝까지 소라를 들고 있을 수 있었을까요?봉화가 꺼지던 순간, 저도 무언가를 잃었습니다『파리대왕』에서 봉화는 단순한 불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합의한 목표, 즉 문명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아이들이 처음 봉화를 피울 때만 해도 그 불은 희망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잭의 사냥 부대가 멧돼지 추격에 정신이 팔린 사이 봉화는 꺼졌고, 마침 지나가던 배는 그냥 떠나버렸습니다.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과 팀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처음에는 다들 역할과 ..

책 리뷰 2026.08.29

고리오 영감 (파리 사회, 부성애, 물질주의)

주변 사람에게 정성을 다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으신가요. 저도 그런 상황을 겪고 나서야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 단순한 19세기 소설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딸에게 전 재산을 바쳤지만 장례식조차 혼자 치러진 한 노인의 이야기. 읽는 내내 씁쓸함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파리 사회, 진흙탕 속의 인간들『고리오 영감』은 1834~35년에 발표된 오노레 드 발자크의 대표작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연작 소설 『인간 희극(La Comédie humaine)』을 구성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인간 희극』이란 발자크가 프랑스 사회 전체를 소설로 기록하겠다는 야심으로 기획한 방대한 연작 프로젝트를 의미합니다.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묶음이 아니라, 동일한 인물들이 반복 등..

책 리뷰 2026.08.23

나의 미카엘 (외로움, 이해, 디아스포라)

헌신적인 남편 옆에서 아내가 점점 더 외로워진다면, 그 결혼에서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아모스 오즈의 장편소설 『나의 미카엘』을 읽으면서 저는 이 불편한 질문을 계속 붙잡고 있었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기저귀를 빨고 논문을 쓰는 남편, 그 옆에서 내면으로 침잠해 가는 아내.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헌신하면 다 되는 걸까 — 외로움의 구조소설의 아내 한나는 우울증 진단을 받은 뒤 침대에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아집니다. 남편 미카엘은 그 시간 동안 새벽에 일어나 빨래를 하고, 아침을 차리고, 학교에 다녀온 뒤 다시 집안을 돌보고, 밤에는 지질학 논문을 씁니다. 행동만 보면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그런데 한나는 그런 남편을 보면서 오히려 "저 남자를 부숴버리고 싶다"는 감정을 느..

책 리뷰 2026.08.23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 (예술적 소외, 창조의 가치, 실용성)

쓸모없는 것은 정말 가치도 없는 걸까요?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단편소설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를 읽고 나서 제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바로 이 질문이었습니다. 5년을 바쳐 만든 나비 기계가 아이의 손 안에서 한순간에 부서지는 장면, 그 장면이 이상하게도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술적 소외 —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의 고독혹시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자신이 정말 공들인 부분을 상대방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때의 그 허탈함 말입니다. 저도 어떤 작업을 하면서 작은 디테일 하나에 며칠을 고민한 적이 있는데, 결과물을 보여줬더니 돌아온 반응이 "그래서 이게 어디다 쓰는 거야?"였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 순간 느꼈던 감각이 호손이 묘사하는 오웬의 ..

책 리뷰 2026.08.22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생존적응, 전체주의, 사유박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1962년 단 한 편의 소설로 소련 문단을 뒤흔들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직접 보낸 8년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든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그것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저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단순히 힘든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이 단순한 고통 그 이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생존 적응 — 수용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일반적으로 수용소 문학이라고 하면 처절한 저항이나 극적인 탈출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전혀 다른 방향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반역죄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복역 중인 40대 남성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너무나 잘 적응해 있습니다.슈호프..

책 리뷰 2026.08.22

인간의 굴레에서 (자기기만, 집착, 자기수용)

『인간의 굴레에서』는 출간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특별하지 않은 삶은 실패한 삶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던집니다. 처음 이 소설을 접했을 때 저는 주인공 필립 캐리가 딱히 좋은 사람도, 대단한 사람도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 어딘가 어긋난 사람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기만과 집착 — 우리는 왜 알면서도 반복하는가혹시 머리로는 "이건 아닌데"라고 알면서도 도저히 멈추지 못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그 감각이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필립 캐리는 신체적 결함을 안고 태어납니다. 그가 가진 내반족(club foot)— 선천적으로 발이 안쪽으로 비틀린 상태 — 은 단순한 신체 조건을 넘어 그의 내면 전체를 형성하는 그림..

책 리뷰 2026.08.22

한국 단편 문학선 (일제강점기, 운수 좋은 날, 무력감)

책 표지에 적힌 연도를 보고 잠깐 멈칫했습니다. 1920년대. 고작 100년 전이라는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권 『한국 단편 문학선 1』에는 1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대부분이 일제강점기에 쓰인 작품들입니다. 읽는 내내 사전을 찾아야 했고, 일본어가 그대로 박혀 있는 대화체에서 '지리가미(휴지)'라는 단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잠시 멍해지기도 했습니다. 가장 불편하고, 가장 오래 남은 독서 경험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소설이 보여주는 두 가지 시대의 민낯이 책에 실린 19편 중 현진건의 「빈처」 한 편을 제외하면 전부 지금으로부터 100년 이내에 쓰인 작품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5편이 1920년대, 9편이 1930년대, 5편이 1940년대 작품이고, 이 중 해방 이..

책 리뷰 2026.08.21

토니오 크뢰거 (시민적 사랑, 예술가의 갈등, 이중성)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므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다." 토마스 만이 1903년에 발표한 중편소설 『토니오 크뢰거』에 나오는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솔직히 좀 서늘했습니다. 사랑을 승패로 표현한다는 게 냉정하게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정확하게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거든요. 예술가의 갈등 — 이름 하나에 담긴 이중성주인공의 이름 자체가 이 소설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토니오'는 라틴 아메리카계 어머니에게서 온 남유럽식 이름이고, '크뢰거'는 북부 독일 출신 아버지의 성입니다. 이름 하나에 두 세계가 충돌하는 구조죠.여기서 토마스 만이 설정한 대립 구도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작품 안에서 북유럽은 이성(理性)과 규율, 시민적 질서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묘사되고, 남유럽은..

책 리뷰 2026.08.21

암흑의 핵심 (권력 타락, 제국주의 비판, 인간 본성)

아무도 견제하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타락한다.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1899)이 125년이 지난 지금도 읽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처음 이 소설을 접했을 때, 커츠라는 인물이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권력 타락 — 커츠는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암흑의 핵심』의 주인공 말로우는 벨기에령 콩고에서 무역회사 증기선 선장으로 부임하면서, 오지 주재소에서 엄청난 양의 상아를 보내오는 커츠라는 인물에 대해 듣게 됩니다. 여기서 상아(ivory)란 당시 유럽 시장에서 피아노 건반, 장식품 재료로 쓰이던 최고급 교역품으로,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는 구슬과 잡동사니를 주고 빼앗아 오는 구조였습니다. 쉽게 말해 착취의 화폐였던 셈입니다.커츠는 회사 입장에서 '가장..

책 리뷰 2026.08.20

허클베리 핀의 모험 (사회적 편견, 짐의 자유, 문학의 재미)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소년의 뗏목 여행 이야기라 가볍게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책을 덮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허클베리가 짐을 도우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는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1885년에 발표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책 50권 중 4위에 올랐고, 역대 미국 문학 작품 번역 순위 1위를 기록한 작품입니다. 그 이유를 읽고 나서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사회적 편견: 배운 것이 옳은 게 아닐 수 있다제가 직접 읽어봤는데, 이 소설에서 가장 불편하면서도 인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허클베리가 짐의 탈출을 도우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입니다. 그 죄책감의 방향이 충격적입니다. 그는 흑인을 함부로 대하는 백인 사회에 분노하는..

책 리뷰 2026.08.20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