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것은 정말 가치도 없는 걸까요?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단편소설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를 읽고 나서 제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바로 이 질문이었습니다. 5년을 바쳐 만든 나비 기계가 아이의 손 안에서 한순간에 부서지는 장면, 그 장면이 이상하게도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술적 소외 —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의 고독
혹시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자신이 정말 공들인 부분을 상대방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때의 그 허탈함 말입니다. 저도 어떤 작업을 하면서 작은 디테일 하나에 며칠을 고민한 적이 있는데, 결과물을 보여줬더니 돌아온 반응이 "그래서 이게 어디다 쓰는 거야?"였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 순간 느꼈던 감각이 호손이 묘사하는 오웬의 상황과 너무 겹쳐서, 소설을 읽는 내내 꽤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호손은 오웬이 처한 상태를 '예술적 소외(artistic isolation)'라는 감각으로 그려냅니다. 여기서 예술적 소외란 단순히 혼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가 주변 사람들에게 전혀 공유되지 않을 때, 그 가치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말합니다. 오웬은 시계공이지만 그가 원하는 건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생각을 물질로 구현하는 것, 즉 정신적 황금(spiritual gold)을 현실의 형태로 빚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오웬을 한마디로 정리했습니다. "미쳤다"고요. 호손은 이 장면에서 날카로운 지적을 합니다. 자신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손쉽게 광기(madness)로 분류하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편협함과 아둔함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추는 방법이라고요. 사도 바울부터 오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방법은 꾸준히 쓰여왔다는 것, 저는 그 냉소 어린 묘사가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피터 영감이라는 인물은 이 편협함의 집약체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호손은 이런 태도를 '상상력을 결여한 현실적 지혜'라고 표현하는데, 그 표현 속에 묘한 독이 들어있습니다. 현실적이라는 말이 칭찬이 아닌 것처럼 들리도록 쓰여 있거든요. 실제로 피터 영감의 손에서 오웬의 나비는 날개를 축 늘어뜨립니다. 믿음 없는 손에서는 아름다움이 살아 숨 쉬지 못한다는 상징인데, 저는 이 장면이 단순한 판타지적 장치가 아니라 감수성(sensibility)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읽었습니다. 감수성이란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느끼는 능력, 그것을 잃으면 아름다움은 그저 금속 조각에 불과해진다는 뜻입니다.
- 예술적 소외: 자신의 가치관이 타인에게 공유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고립감
- 정신적 황금: 추상적 생각을 물질의 형태로 구현하려는 예술가의 충동
- 감수성: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인식하는 내적 능력
- 광기 낙인: 이해 불가능한 것을 '미쳤다'고 처리하는 사회적 방어 기제
창조의 가치와 실용성 — 어느 쪽이 더 우월한가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호손은 정말 "예술가는 고귀하고 실용주의자는 천박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단순한 이분법에 계속 걸렸습니다.
소설 속 대장장이 로버트는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생활에 필요한 철물을 만드는 실용적인 장인이면서도 오웬의 예술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호손이 굳이 이 인물을 배치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용성과 예술적 감수성이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요. 제가 직접 이 소설을 읽어봤는데, 로버트는 소설 안에서 가장 균형 잡힌 인물로 보였습니다. 실용과 아름다움 사이 어딘가에 서있는 사람이랄까요.
한편으로는 소설이 피터 영감이나 마을 사람들을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묘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실용성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감수성이 없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인 경우가 많거든요. 대장장이가 튼튼한 문고리를 만드는 일도 누군가의 삶을 안전하게 지키는 창조 행위입니다. 그 가치를 천박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꽤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몇 달간 준비한 일이 예상치 못한 한 가지 변수로 무너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완전한 실패라고만 느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판단력과 감각이 이후 다른 일에서 그대로 작동했습니다. 오웬이 나비의 파괴 앞에서 차분했던 이유가 아마 이것이었을 겁니다. 결과물이 사라져도 그것을 만들어낸 정신은 남는다는 것. 호손은 이것을 "상징물이 아닌 실체 자체를 즐기게 된다"는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실체(essence)란 완성된 작품 너머에 존재하는 창조의 원리, 즉 예술가가 내면에 쌓아온 사고의 총체를 말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는 예술가에게도 소통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고 봅니다. 예술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언어라면, 자신의 세계를 전달하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웬이 겪는 소외의 일부는 세상의 몰이해 때문이지만, 또 다른 일부는 소통의 단절에서도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Project Gutenberg — Mosses from an Old Manse (호손 원문)에서 원문을 직접 확인해볼 수 있는데, 오웬의 고립은 선택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 이 소설을 단순한 예술 예찬으로 읽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문학 연구자들은 호손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이 긴장 구도를 '이상과 현실의 변증법(dialectic of ideal and real)'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변증법이란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가 충돌하면서 더 높은 인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출처: Britannica — Nathaniel Hawthorne에 따르면 호손은 생애 전반에 걸쳐 청교도적 죄의식과 낭만주의적 이상 사이의 긴장을 탐구한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 역시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는 어떤 소설인가요?
A. 너새니얼 호손이 쓴 단편소설로, 시계공 오웬이 5년에 걸쳐 살아 움직이는 나비 기계를 만드는 과정을 그립니다. 예술적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과 실용성만을 믿는 사람들 사이의 충돌을 중심으로, 창조의 의미와 예술가의 소외를 탐구합니다. 결말에서 나비가 파괴되지만 오웬이 담담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Q. 오웬의 나비가 피터 영감의 손에서 죽어가는 이유가 뭔가요?
A. 호손은 이 나비를 믿음과 감수성이 있는 손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설정합니다. 피터 영감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신뢰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손 위에서 나비의 정교한 감수성이 고통을 받는다고 오웬은 말합니다. 이것은 판타지적 장치이기도 하지만, 예술이 이해와 공감 없이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상징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Q. 호손은 실용성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본 건가요?
A. 꼭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소설 속 대장장이 로버트는 실용적인 물건을 만들면서도 오웬의 예술을 이해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호손이 이 인물을 배치한 것은 실용성과 예술적 감수성이 반드시 대립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태도를 비판한 것은 분명합니다.
Q. 나비가 부서졌는데 오웬이 괜찮은 이유가 뭔가요?
A. 호손은 오웬이 이미 나비라는 상징물 너머에 있는 실체, 즉 창조의 정신 자체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술가가 진정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면 눈에 보이는 작품보다 그것을 만들어낸 사고와 과정이 더 중요해진다는 것입니다. 결과물이 파괴되어도 그 과정에서 축적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Q. 이 소설을 어디서 읽을 수 있나요?
A. 호손의 단편집 『구목사관의 이끼(Mosses from an Old Manse)』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영문 원문은 Project Gutenberg에서 무료로 열람 가능하며, 국내에는 다양한 번역본이 출판되어 있습니다. 호손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읽으면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결론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를 읽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었던 질문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쓸모가 없으면 가치도 없는 것인가?" 모든 것을 효율과 결과로 판단하는 분위기 속에서, 당장 유용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주는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계속 남았습니다.
저는 이 소설의 핵심을 예술가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이야기로 읽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기준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서로 다른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소설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한 편의 19세기 단편소설이 이 질문을 이렇게 선명하게 던진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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