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왜 틀린 이유를 말하면서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까요. 저도 처음에 이 질문을 마주쳤을 때 꽤 당황했습니다. 찰스 틸리의 『왜의 쓸모』는 '이유'라는 것이 진실 전달 수단이 아니라 관계 조율의 도구라는 점을 사회학적으로 파고드는 책입니다. 직접 읽어보니, 제가 개발자로 일하며 매일 했던 행동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는 이유를 말하는가 — 사회적 관계 조율 도구로서의 설명
개발자로 일할 때, 서버 장애가 발생하면 저는 항상 두 가지 버전의 설명을 준비했습니다. 같은 장애인데도 보고 대상이 달라지면 설명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동료 개발자에게는 스택 트레이스(stack trace), 즉 오류가 발생한 코드 실행 경로를 그대로 보여주며 SQL 쿼리의 어느 지점에서 데드락(deadlock)이 걸렸는지를 바로 짚었습니다. 여기서 데드락이란 두 개 이상의 프로세스가 서로 상대방의 자원을 기다리며 무한 대기 상태에 빠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반면 현업 담당자에게는 "주문 데이터가 동시에 몰려 처리 순서가 꼬이면서 시스템이 잠깐 멈췄다"는 식으로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찰스 틸리는 이 차이를 학술적 논고(technical account)와 이야기(story)라는 두 범주로 설명합니다. 학술적 논고란 전문 지식과 명확한 근거를 동원한 설명 방식이고, 이야기는 인과론적 흐름은 유지하되 누구나 아는 상식과 공유된 신념으로 구성한 설명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 두 가지를 상황에 따라 오가는 것이 실무에서 가장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기술이었습니다.
틸리는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 관습(convention): 보편적이면서 공식적 형식에 기대는 설명. "제가 좀 덤벙대서요" 같은 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 이야기(story): 보편적이면서 인과론적 흐름을 갖춘 설명. 예외적 사건을 일상 속으로 편입시킬 때 씁니다.
- 코드(code): 구체적이면서 규칙이나 절차에 근거한 설명. 법률 판결이나 의학적 진단이 대표적입니다.
- 학술적 논고(technical account): 구체적이면서 전문 지식으로 뒷받침된 인과론적 설명입니다.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면접에서도 이 구조가 그대로 작동했습니다. 면접관이 프로젝트를 물으면 단순히 결과를 나열해서는 안 됐습니다. "왜 그 기술을 선택했는지", "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지"를 설명해야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단순한 면접 스킬이 아니라, 틸리가 말한 것처럼 두 사람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회언어학(sociolinguistics) 연구에서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사회언어학이란 언어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변화하는지를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말의 진실 여부보다 말이 놓이는 사회적 맥락과 관계가 의사소통의 성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은 이미 다수의 연구로 검증되어 있습니다(출처: 미국언어학회).
이유의 형식보다 중요한 것 — 상황과 관계가 결정한다
솔직히 이 부분은 책을 읽기 전까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유 설명 방식에 우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술적 논고나 코드처럼 논리적이고 전문적인 설명이 더 고차원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틸리는 그것이 오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건 그 이유가 얼마나 그 상황과 관계에 맞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이 감각은 훈련이 됩니다. 같은 팀장에게도 퇴근 직전 가벼운 자리에서는 관습적인 말로 빠르게 처리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오늘 좀 정신이 없었습니다"라는 말 한마디가 길고 논리적인 해명보다 관계를 더 매끄럽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틸리는 이 선택을 결정짓는 두 가지 변수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상하 관계, 둘째는 두 사람 사이의 심리적 거리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는 이유를 생략하거나 축소해도 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는 이유 설명에 인정과 사과까지 더해야 합니다. 이 현상은 직장 내 의사소통을 다룬 국내 연구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출처: 한국커뮤니케이션학회).
또 하나,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자세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강연 도중 잠깐 멈췄을 때 청중에게는 "죄송합니다, 잠깐 딴생각이 들었어요"로 충분하지만, 오랜 친구에게는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설명해야 관계가 유지됩니다. 제 경험상 이건 가까운 관계일수록 서로에게 더 많은 '진짜 이유'를 요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이 사회적 관계라는 틀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유를 설명하는 행동에는 심리적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도 크게 작용합니다. 심리적 방어기제란 불안이나 위협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심리 전략입니다. 개인이 왜 특정 방식으로 이유를 구성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사회학적 분석만으로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덮고 나서 한참 동안 최근의 대화들을 되짚어봤습니다. 저도 모르게 관계를 지키려고 사실과 다른 이유를 댔던 순간들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이 책이 자기 계발 팁을 주는 책이었다면 그냥 넘겼을 텐데, 인간이 왜 이유를 만드는가라는 질문 자체를 파고드는 방식이 오히려 더 오래 남았습니다. 대화가 어색하게 느껴지거나 설명이 자꾸 어긋난다는 느낌이 든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CnV5idNaufQ&list=PLUpgTv3bu9rGxQBAMVaMvam27P0YbiY29&index=8
'책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역사는 좌우가 아니다 (고전적 자유주의, 개방성, 포퓰리즘) (1) | 2026.06.07 |
|---|---|
|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맥락, 착각, 창작) (0) | 2026.06.07 |
| 외계인 자서전 (서사 구조, 정체성, 고독) (0) | 2026.06.06 |
| 편안함의 습격 (편안함, 자가포식, 도파민) (0) | 2026.06.06 |
| 성공과 운의 법칙 (배경과맥락, 핵심분석, 실전적용) (0) | 2026.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