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외계인 자서전 (서사 구조, 정체성, 고독)

_ming_racle 2026. 6. 6. 12:10
외계인의 자서전


SF 소설을 읽으면서 눈물이 날 뻔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솔직히 그런 경험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달랐습니다. 마리 헐린 버티니의 『외계인 자서전』을 덮고 나서 한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Java 개발자로 일하던 시절, 새벽에 혼자 코드를 들여다보며 "내가 이 길을 가는 게 맞는 건가"라고 중얼거리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40년 인생을 꿰뚫는 서사 구조, 어떻게 설계되었나

이 소설의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는 꽤 독특한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서사 구조란 이야기를 배열하고 전달하는 방식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무엇을 어떤 순서로 어떤 시제로 보여주느냐가 핵심입니다. 이 소설은 주인공 아디나 조르노의 탄생부터 40여 년을 시간 순으로 따라가되, 각 챕터의 제목을 별의 생애 주기에 맞춰 배열합니다. 성운에서 시작해 블랙홀로 끝나는 구조입니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우주의 언어로 번역한 셈입니다.
제가 개발 공부를 하면서 알고리즘 설계를 처음 배울 때, 로직의 흐름을 어떻게 짜느냐가 결과물의 질을 거의 결정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의 뼈대를 어떻게 짜느냐가 독자가 느끼는 감정의 밀도를 결정합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이 소설의 모든 문장이 현재형 시제(present tense)로 쓰여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형 시제란 사건을 이미 완료된 과거로 서술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방식입니다. 일반적인 소설은 과거형으로 사건을 완결된 것으로 제시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아디나의 어린 시절 수영장 에피소드,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아 혼자 남겨진 그 장면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읽힙니다. 읽는 내내 제 가슴 어딘가를 건드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소설의 핵심 장치인 보이저 1호(Voyager 1)와 아디나의 탄생을 병치하는 아이디어도 인상적입니다. 1977년 9월, 아이는 지구에 도착하고 탐사선은 지구를 떠납니다. 정반대의 동선이 첫 페이지에서 교차합니다. 이 대비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metaphor), 즉 특정 개념을 다른 대상으로 빗대어 표현하는 문학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아디 나가 외계에서 지구로 파견된 존재라는 설정은, 그 탐사선이 지구를 벗어나 외계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과 대칭을 이룹니다.
이 소설이 다루는 주제와 관련하여, 소속감과 정체성 혼란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실제로 연구된 바 있습니다. 만성적인 소외감이 우울감 및 불안과 강한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사실이 여러 심리학 연구에서 확인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아디나가 평생 느끼는 고독감은 단순한 소설적 설정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감각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가 느낀 솔직한 한계도 있습니다. 아디 나가 외계인이라는 설정은 인간의 소외를 표현하는 데 분명 효과적이지만, 그 상징성이 지나치게 전면에 나오는 순간 현실감이 살짝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다 현실적인 맥락 안에 같은 감정을 녹여냈다면, 더 폭넓은 독자들이 쉽게 진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아디나가 경험하는 핵심 서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탄생과 보이저 1호 발사의 병치: 지구 도착 vs. 지구 이탈이라는 대칭 구조
  • 별의 생애 주기를 챕터 제목으로 사용: 성운 → 블랙홀로 이어지는 구성
  • 현재형 시제 전면 사용: 사건을 신화적이고 반복적인 것으로 만드는 효과
  • 팩시밀리를 통한 외계와의 교신: 내면과의 소통으로도 읽히는 장치
  • 네 번의 고백 구조: 주변인의 반응 변화가 독자에게 판단을 위임하는 방식


개발자가 읽은 정체성의 고독, 그리고 현실적인 공감

솔직히 이 소설에서 제가 가장 강하게 반응한 부분은 외계인 설정이 아니었습니다. 아디 나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어딘가 다르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저는 Java 백엔드 개발을 하다가 임베디드 시스템과 AI 영역까지 공부 범위를 넓혀왔습니다. 임베디드 시스템(embedded system)이란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드웨어에 내장된 컴퓨팅 환경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PC나 서버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센서, 모터, 마이크로컨트롤러가 맞물려 작동하는 세계입니다. 이 영역을 처음 건드렸을 때 주변에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취업 준비 커뮤니티에서도, 오프라인 스터디에서도 관심사가 달랐습니다. 제가 임베디드 얘기를 꺼내면 대화가 조용해지는 경험을 꽤 했습니다.
아디 나가 어린 시절 또래 집단에 끼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관계가 어긋나는 장면들이 그래서 낯설지 않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이질감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사와 속도의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아디 나도 마찬가지처럼 읽혔습니다.
또 하나 공명했던 부분은 청각 민감증(misophonia) 에피소드입니다. 청각 민감증이란 타인이 내는 특정 소리, 예를 들어 씹는 소리나 목 가다듬는 소리에 강한 불쾌감이나 분노 반응을 보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디 나는 이 반응을 자신이 외계인이라는 증거 중 하나로 해석했다가, 성인이 된 후 의학 용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걸 느끼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는 거야?"라는 그 안도감의 묘사가 짧고 담담하게 쓰여 있는데, 그 문장 앞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혼자라고 느꼈던 것이 사실은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늦게 알았을 때의 감각. 제가 임베디드 AI 관련 커뮤니티를 처음 찾았을 때도 비슷한 안도감이 있었습니다.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해서는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아디나가 실제 외계인인지, 아니면 현실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내러티브(narrative)인지를 끝까지 확인해주지 않습니다. 내러티브란 사건을 의미 있는 이야기로 구성하는 방식으로, 특히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의미화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자기 서사를 가리킵니다. 이 모호함이 작품의 미덕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제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조금 더 명확한 단서를 줬다면 독자 경험이 더 단단해졌을 것 같습니다. 해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과, 핵심 질문을 회피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 독서 인구 통계에 따르면 성인 연간 독서량은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이지만, SF 장르는 최근 몇 년간 꾸준한 독자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출처: 문화체육관광부). 이 소설은 SF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실제로 읽히는 방식은 문학 소설에 가깝습니다. SF를 잘 읽지 않는 분들도 충분히 진입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이 마음에 남는다면, 아디나의아디나의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 때문일 겁니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솔직한 장점입니다. 삶도 마찬가지로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으니까요.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걸까"라는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분들이라면, 아디나의 40년 여정이 생각보다 가까운 이야기로 읽힐 겁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임베디드 관련 코드를 한 줄 더 짰습니다.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YXHXTui-L4o&list=PLUpgTv3bu9rGxQBAMVaMvam27P0YbiY29&index=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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