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꽤 오랫동안 이유를 잘 설명하는 것이 곧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좋다고요. 그런데 『왜의 쓸모』를 읽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흔들렸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찰스 틸리(Charles Tilly)는 인간이 이유를 대는 행위 자체를 사회학적으로 해부하는데, 읽으면서 제가 평소에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떠올라 꽤 민망해졌습니다.

이유를 댄다는 것의 진짜 의미
찰스 틸리는 인간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이유를 말하는 동물이라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가 집중하는 건 그 이유가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닙니다. 대체 왜 인간은 굳이 이유를 대는가, 그 행위 자체가 사회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파고들죠.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게 생각보다 훨씬 와닿는 이야기입니다. 회사에서 보고서를 늦게 낸 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때 "서버 오류로 파일이 날아가서 다시 작성했습니다"라고 길게 설명했습니다. 사실이었는데도 팀장님 표정이 영 좋지 않았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그 상황에서 필요한 건 원인 분석이 아니라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드리겠습니다" 한 마디였던 것 같습니다.
틸리는 이유를 네 가지 범주로 나눕니다. 관습(convention), 이야기(story), 코드(code), 학술적 논고(technical account)가 그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두 가지 축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설명이 얼마나 보편적이냐 대 구체적이냐이고, 다른 하나는 인과론적 설명에 치중하느냐 대 기존 공식에 기대느냐입니다. 여기서 인과론적 설명이란 어떤 원인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 관습: 보편적이면서 공식에 기대는 설명 ("제가 좀 덤벙댑니다, 죄송합니다")
- 이야기: 보편적이면서 인과론적 설명 (예외적 사건을 납득 가능하게 서술)
- 코드: 구체적이면서 공식에 기대는 설명 (법 조항, 병원 규칙 등)
- 학술적 논고: 구체적이면서 인과론적 설명 (전문 지식 기반의 분석)
관습과 코드, 언제 어떤 이유를 써야 하는가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예시는 커피를 쏟는 장면입니다. 동료 신문에 커피를 엎질렀을 때, 물리학적으로 마찰계수를 설명하거나 아침에 엄마와 싸운 이유를 늘어놓으면 상대방은 당혹스럽습니다. "제가 좀 덤벙댑니다, 죄송해요" 한 마디면 충분한데도 말이죠. 이게 바로 관습(convention)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관습이란 사회적으로 반복되는 상황에서 통용되는 정형화된 해명 방식을 뜻합니다.
반면 코드(code)는 완전히 다릅니다. 틸리가 유럽 어느 도서관에서 오래된 문서를 복사하려 했더니 담당자가 나타나 "규정 몇 조몇 항에 따라 불가합니다"라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납득이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미리 정해진 규칙과 얼마나 정합하느냐가 판단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코드란 법, 의료 진단 기준, 종교 의례처럼 집단이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둔 규칙 체계를 말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미묘하게 일상 곳곳에 있습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이 치료는 보험 적용 기준에 해당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때, 저는 처음엔 그게 얼마나 불합리한지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의사 입장에서는 그게 코드에 따른 설명이고, 거기에 인과론적 반론을 들이대는 게 맞지 않는 언어를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이야기 형태의 설명이 필요한 자리에 학술적 논고를 꺼내면 어색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찰스 틸리의 분석은 에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이 개척한 사회적 상호작용 연구의 흐름을 잇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고프만은 일상적 대면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연출하는지를 분석했는데(출처: Erving Goffman - Wikipedia), 틸리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유를 대는 행위" 자체를 그 연출의 핵심 요소로 봤습니다.
권력관계가 이유의 분량을 결정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하면서도 가장 공감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상하 관계에 따라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과 분량이 달라진다는 대목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피해를 줬을 때는 이유를 생략하거나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고, 반대 상황에서는 이유뿐 아니라 사과와 인정까지 함께 담아야 한다는 것이죠.
틸리의 분석에 따르면, 사회적 영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이 네 가지 이유 유형을 적재적소에 능숙하게 활용한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 보면 그 말이 맞습니다. 협상이나 보고 자리에서 말을 잘한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황을 빠르게 읽고 지금 이야기(story)로 설명해야 하는 자리인지, 학술적 논고(technical account)가 필요한 자리인지를 직관적으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이야기란 예외적이고 복잡한 사건을 인과의 틀로 단순화해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게 전달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에서 비판적으로 생각해 본 게 있습니다. 윗사람이 이유를 생략하거나 축소하는 것을 단순한 대화 방식의 차이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건 소통 스타일이 아니라 권력의 남용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자신의 결정과 행동을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또한 상황에 맞는 이유를 선택하는 능력이 설득과 정당화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언어가 권력을 재생산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처럼(출처: Pierre Bourdieu - Wikipedia), 이유를 잘 구사하는 능력이 항상 좋은 소통으로만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상황에 어울리는 설명인지와 동시에 그 설명이 진실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두 가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왜의 쓸모』는 자기계발서인가요, 학술서인가요?
A. 엄밀히 말하면 교양 사회학서에 가깝습니다. 찰스 틸리 본인도 "양질의 이야기(superior story)"를 쓰려는 의도로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습니다. 어렵지 않게 읽히지만, 대화법을 직접 가르쳐주는 실용서는 아닙니다. 제 경험상 2장부터 읽고 나중에 1장으로 돌아오면 훨씬 잘 들어옵니다.
Q. 관습, 이야기, 코드, 학술적 논고 중 어떤 게 가장 좋은 이유 방식인가요?
A. 틸리는 네 가지 사이에 우열이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어떤 이유가 더 고차원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과 두 사람의 관계에 따라 적합한 방식이 달라질 뿐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학술적 논고가 가장 정확하니 가장 좋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겪어보니 상황을 잘못 읽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Q. 찰스 틸리가 말하는 이야기(story)가 단순한 스토리텔링과 다른 점이 뭔가요?
A. 틸리가 말하는 이야기는 예외적인 사건을 일상 속에 편입시키기 위해 원인을 단순화하고 도덕적 판단까지 담는 과정입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처럼, 사건 한가운데 있을 때는 이야기가 보이지 않고 그 바깥으로 나와야 비로소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이 점에서 단순한 경험 전달보다 훨씬 사회적 기능이 강합니다.
Q.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 이유를 잘 쓴다는데, 어떻게 연습할 수 있나요?
A. 틸리는 구체적인 훈련법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제가 이 책을 읽고 시도해 본 것은 대화하기 전에 "지금 이 상황이 관습으로 넘어갈 자리인가, 이야기가 필요한 자리인가"를 한 박자 멈춰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해도 말이 훨씬 상황에 맞아 떨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결론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저는 이유를 잘 말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그게 절반만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상황을 읽고, 상대방과의 거리와 위계를 파악하고, 지금 이 자리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이유를 선택하는 능력이 실제로는 훨씬 더 크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 능력이 관계를 매끄럽게 하는 수단에서 그치지 않으려면, 동시에 자신의 이유가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의 쓸모』는 그 판단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될 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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