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역사는 좌우가 아니다 (고전적 자유주의, 개방성, 포퓰리즘)

_ming_racle 2026. 8. 13. 14:55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


Java 개발자로 일하면서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쓰는 기술은 왜 다 영어 이름이지?" Linux 커널, Spring 프레임워크, Git 저장소까지, 제가 매일 다루는 것들 대부분이 서구에서 시작해 전 세계 개발자들이 함께 키워온 오픈소스 생태계입니다. 파리드 자카리아의 책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를 읽고 나서 그 이유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체감했습니다.

좌우 구분이 무너진 자리에 남은 것

혹시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선거 뉴스를 보다가 "저 사람은 좌파야, 우파야?"를 따지는 데 에너지를 다 쓰고, 정작 그 사람이 무엇을 하려는지는 놓쳐버리는 경험. 저는 꽤 자주 그랬습니다.
자카리아는 이 책에서 바로 그 지점을 짚습니다. 경제적 좌파란 분배 중심, 강한 규제, 큰 정부를 지향하는 체제를 말하고, 경제적 우파란 자유 시장, 작은 정부, 규제 완화를 지향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이 좌우 축이 현대 정치를 설명하는 데 사실상 유효성을 잃었다고 주장합니다. 대신 그가 제시하는 개념이 바로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입니다. 여기서 고전적 자유주의란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절대 권력과 교회의 권위에 맞서 개인의 인권, 종교의 자유, 법치주의, 자유로운 시장을 옹호했던 사상적 흐름을 의미합니다. 미국에서 흔히 쓰는 '리버럴(진보)'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이 틀로 보면 지난 400년의 역사는 좌우의 싸움이 아니라 개방성과 폐쇄성의 반복 충돌입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확산될 때마다 그에 반발하는 반자유주의적 움직임이 등장하고, 이 둘이 밀고 당기며 역사가 굴러왔다는 것입니다.
이 시각이 저한테 특히 와닿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임베디드 시스템이나 AI를 공부하면서, 기술이 발전하면 경제 구조가 바뀌고, 그 구조 변화가 다시 사람들의 정체성과 정치를 바꾼다는 걸 몸으로 느낍니다. AI 혁명(Artificial Intelligence Revolution)이라는 말이 요즘 너무 흔해졌지만, AI 혁명이란 단순히 새 기술이 나오는 게 아니라 기존 산업 구조와 노동 시장 전체를 재편하는 지각 변동을 뜻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 내 일자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묻기 시작한다는 점이 책에서 말하는 정체성 혁명(Identity Revolution)과 정확히 겹쳤습니다. 정체성 혁명이란 급격한 기술·경제 변화 속에서 기존의 사회적 역할과 집단 정체성이 흔들리며 새로운 정치 에너지가 분출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트럼프, 보리스 존슨의 브렉시트, 헝가리의 오르반, 이탈리아의 멜로니는 모두 같은 줄기인가요? 자카리아는 그렇다고 봅니다. 이들은 우파 포퓰리스트(Right-wing Populist)입니다. 여기서 포퓰리스트란 기득권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자극하며 기존 제도와 합의를 무시하고 직접적 감정 동원으로 권력을 획득하려는 정치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자카리아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남미의 콜롬비아, 멕시코, 칠레에서 집권한 좌파 포퓰리스트들 역시 구조는 동일하다고 지적합니다. 좌든 우든 포퓰리즘은 규범보다 결과를, 절차보다 감정을, 타협보다 배제를 선택한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솔직히 약간 불편함도 느꼈습니다. 저자 본인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전문가이다 보니, 책 전반에 걸쳐 공화당과 트럼프에 관한 분석은 세밀한 반면, 민주당의 한계나 좌파 포퓰리즘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짧습니다. 미국 중심적 시각이 완전히 배제되기는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포퓰리즘이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듯, 실제로 전 세계 민주주의 지수는 지속적으로 악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란 선거 과정, 시민 자유, 정부 기능 등 다섯 가지 항목을 평가해 각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수치화한 지표입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권위주의 체제 또는 혼합 체제 아래 살고 있습니다(출처: Economist Intelligence Unit).

네덜란드가 먼저 발명했던 것들

개발을 공부하면서 저는 "왜 이 기술은 여기서 나왔을까"를 자주 생각합니다. 그 질문이 17세기 네덜란드 이야기를 읽으면서 다시 떠올랐습니다. 왜 하필 네덜란드였을까요?
자카리아는 책 전반부에서 이 질문에 꽤 많은 페이지를 씁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이 부분이 책 전체에서 가장 생생한 대목이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암스테르담 시민의 1인당 연소득이 파리 시민의 약 네 배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부유한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럽 전체가 절대 군주제(Absolute Monarchy) 체제 아래 있을 때, 네덜란드만 선출 총독, 활발한 의회, 분권화된 소도시 연합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절대 군주제란 왕이 입법·사법·행정 모든 권한을 단독으로 행사하며 어떤 외부 견제도 받지 않는 통치 형태를 말합니다.
왜 네덜란드만 달랐을까요? 자카리아는 지리 조건에서 출발합니다. 네덜란드는 저지대 습지 지형 때문에 장원제(Feudal Manorialism) 자체가 형성되기 어려웠습니다. 장원제란 소수 귀족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그 위에서 농노가 일하는 중세 유럽의 전형적인 경제·사회 구조입니다. 개간으로 만든 땅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궈낸 것이라 권리가 자연스럽게 분산되었고, 그 결과 17세기 초에 이미 도시화율이 50%를 넘었습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의 도시화율이 8%였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얼마나 극적인지 바로 느껴집니다.
여기서 제가 개발자로서 무릎을 쳤던 부분이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청어잡이 산업에서 투자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여러 선박에 나눠 투자하는 방식을 고안했고, 그게 보험업과 주식 거래로 이어졌습니다. 세계 최초의 공개 주식회사인 동인도 회사(VOC,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가 바로 여기서 탄생합니다. 여기서 VOC란 1602년 네덜란드에서 설립된 세계 최초의 상장 주식회사로, 일반 투자자들에게 지분을 공개 판매하고 그 자본으로 무역 원정을 운영한 최초의 다국적 기업 형태를 의미합니다. 오픈소스 생태계에서 코드를 누구나 보고 기여할 수 있게 만든 구조와 어딘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방하면 더 커진다는 원리가 400년 전에도 작동했던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네덜란드 이야기가 자유주의의 완전한 성공 사례라고 보기에는 조심스럽습니다. 동인도 회사는 실제로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강제 노동과 착취를 자행한 식민 착취 기구이기도 했습니다. 자유로운 무역과 개방성이 한편에서는 착취와 수탈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이 책이 충분히 다루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저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제시하는 틀은 현재를 이해하는 데 꽤 유용합니다. 지정학적 혁명(Geopolitical Revolution)이라는 개념이 특히 그랬습니다. 지정학적 혁명이란 세계 권력의 중심 자체가 이동하는 구조적 전환을 말합니다. 저자는 근대 이후 이런 혁명이 세 번 있었다고 봅니다.

  • 15세기 대항해 시대, 서구가 세계 무대의 전면에 등장
  • 19세기말~20세기,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 확립
  • 현재, 중국·인도·러시아·튀르키예 등 주변부 국가들의 급격한 부상

취업을 준비하면서 저는 이게 단순히 뉴스 속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실감합니다. AI, 임베디드, 반도체 분야의 채용 공고가 어느 나라 기업인지, 어떤 기술 스택을 요구하는지가 바로 이 지정학적 흐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계 질서의 변화가 제 진로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확인했습니다. 국제경제 구조 변화와 청년 고용 간의 연관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출처: OECD).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는 완벽한 책이 아닙니다. 자유주의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인상, 미국 중심적 시각, 개방성 대 폐쇄성이라는 틀이 모든 현상을 담기엔 다소 단순하다는 한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세계가 왜 이렇게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지는지를 하나의 일관된 시각으로 설명해 주는 책은 드뭅니다. 뉴스가 너무 많아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신다면, 이 책 한 권이 그 혼란에 나름의 좌표를 잡아줄 수 있을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IZnGeDlw6Vg&list=PLUpgTv3bu9rGxQBAMVaMvam27P0YbiY29&index=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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