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질문의 힘, 수행적 언어, 문화 교류)
질문이 틀리면 답도 틀린다. 750만 년을 계산한 슈퍼컴퓨터가 내놓은 정답이 '42'였던 이유는 연산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질문이 잘못됐기 때문이었다. 서동욱 철학자의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를 접하고 나서 제가 처음 든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철학책이라는 말에 지레 겁먹고 미루던 책이었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오히려 제 일상의 언어들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질문의 힘 — 정답보다 먼저 와야 하는 것
더글러스 애덤스의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는 '깊은 생각(Deep Thought)'이라는 슈퍼컴퓨터가 등장합니다. 이 컴퓨터는 "우주와 그 모든 것의 해답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750만 년 동안 연산한 끝에 '42'라는 답을 내놓습니다. 황당하죠. 근데 서동욱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컴퓨터가 틀린 게 아니라, 질문이 틀렸던 것이라고 짚어냅니다.
제가 강의를 들을 때 자주 했던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돌이켜보면 이 질문 안에는 이미 오류가 숨어 있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시간과 시행착오를 통째로 건너뛰고, 짧은 조언 한 마디로 단번에 도달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 안에 담겨 있었던 거죠. 이 책은 그런 질문 자체가 이미 잘못 설계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적 사유(思惟), 즉 어떤 문제를 깊이 따져보는 인식 행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쉽게 말해 '어떻게 잘할까' 이전에 '나는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가'를 먼저 따져보는 것입니다. 이 책이 다루는 수십 개의 짧은 글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 그 질문을 올바르게 다듬는 연습처럼 읽힙니다. 쓰레기, 혼밥, 수집, 인공지능까지 다루는 주제가 이렇게 방대한데도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 질문의 구조가 답의 범위를 결정한다 — 질문이 넓고 막연하면 어떤 답도 의미를 갖기 어렵다
- 철학적 사유는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당연하게 지나쳤던 것을 다시 들여다보는 태도다
- 이 책은 '어떤 주제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만드는 책'에 가깝다
수행적 언어 — "사랑한다"는 말이 감정 표현이 아닌 이유
이 책에서 제가 가장 오래 멈춰 읽었던 대목은 사랑의 말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서동욱은 "사랑한다"는 말이 이미 가지고 있는 감정을 꺼내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순간 사랑이라는 현실을 새로 만들어낸다고 씁니다. 처음에는 좀 과한 해석처럼 느껴졌는데, 읽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언어철학에서는 이를 수행적 언어(performative utterance)라고 부릅니다. 수행적 언어란 어떤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행위 자체가 현실을 만들어내는 언어를 뜻합니다. "이로써 두 사람의 결혼을 선포합니다"라는 말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말이 발화되는 순간 결혼이라는 사실이 성립되는 것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그 순간 나를 그 관계에 묶어두는 일종의 서약이 된다는 거죠.
제가 직접 떠올려봤습니다. 서로 마음을 알고 있는 사이라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말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쑥스러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 말이 가져오는 구속, 즉 책임감을 피하고 싶다는 회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동욱은 그 말을 하지 않고 돌아선 사람에게 남는 것은 자유지만, 그 자유는 무인도에 혼자 있는 자유라고 표현합니다. 이 한 줄이 제게 꽤 오래 남았습니다.
언어학자 J.L. 오스틴이 처음 제안한 수행적 언어 이론은 이후 철학과 언어학 전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서동욱은 이 이론을 어렵게 설명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언어에 적용해 독자 스스로 그 의미를 체감하게 만듭니다. 이런 점이 이 책이 대중 철학서로서 뛰어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문화 교류 — 오류조차 창조의 일부가 되는 역사
같은 시기에 읽은 마틴 포크너의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는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와 묘하게 겹쳐 읽혔습니다. 두 책 모두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을 낯설게 보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었거든요. 포크너의 책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인물은 루이스 카몽이스(Luís de Camões)라는 16세기 포르투갈 시인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이름이었습니다.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 항로를 개척한 뒤, 포르투갈은 유럽 변방에서 세계 교역의 중심으로 급부상합니다. 카몽이스는 그 항로를 따라 마카오까지 진출했다가 횡령 혐의로 압송되는 길에 배가 난파되어 메콩 강변 어부들에게 구조됩니다. 그 좌초된 시간 속에서 쓴 것이 포르투갈의 국민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íadas)'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서사시의 작법이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그대로 차용했다는 점입니다. 2,000년 전 그리스, 1,500년 전 로마의 서술 방식을 16세기 포르투갈 시인이 메콩 강변에서 되살려 자국의 대항해를 담아냈습니다. 포르투갈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거쳐 좌초된 한 사람이 고대 유럽의 문학 전통으로 자국의 역사를 써낸 것, 이것이 포크너가 말하는 문화 교류의 실체입니다(출처: Encyclopaedia Britannica).
포크너는 문화를 보는 두 가지 시각을 대비시킵니다. 첫 번째는 문화를 공동체가 소유하고 외부로부터 지켜야 할 자산으로 보는 관점이고, 두 번째는 문화가 충돌과 수입과 변형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진다는 관점입니다. 포크너는 후자를 지지하면서, 심지어 침략이나 절도처럼 부정적인 전파 방식조차 생물학적 진화에서 돌연변이(mutation)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돌연변이란 유전자 배열의 오류가 새로운 형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뜻합니다. 문화도 마찬가지로, 전파 과정의 오류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창조물을 낳는다는 거죠.
이 논리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점은 저도 경계했습니다. 그러나 포크너는 피침략 문화권의 창의적 저항과 재적응 역시 그 과정의 일부로 충분히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 균형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걸리지 않게 해줬습니다.
결론
두 책을 나란히 읽으면서 제가 가장 크게 가져간 것은 하나입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 정답부터 찾으려 하기 전에, 지금 제가 던지는 질문이 제대로 설계된 것인지를 먼저 따져보는 습관입니다. 질문이 틀리면 아무리 오래 생각해도 42라는 숫자밖에 나오지 않으니까요.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부제가 '삶을 쓰다듬는 위안의 책'이라고 붙어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책은 위안보다 각성에 가깝습니다. 당연하게 지나쳤던 말 한마디, 익숙하게 써온 단어 하나가 갑자기 낯설어지는 순간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 낯섦이 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게 이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 펼쳐 들고 싶게 만드는 이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