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지키다 (서사구조, 성장서사, 역사소설)

공쿠르상(Prix Goncourt)은 프랑스 문학 최고 권위의 상으로, 수상작이 곧 그해 최고의 소설로 통하는 기준이 됩니다. 장 바티스트 앙드레아의 『그녀를 지키다』는 2023년 그 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장편을 펼쳐 들면서 솔직히 이 분량에 먼저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읽기 시작하고 나서는 좀처럼 멈추기가 어려웠습니다.
80년을 담은 서사구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소설은 1986년 사크라 수도원에서 시작합니다. 여든두 살의 한 노인이 임종을 앞두고 수도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그가 갑자기 입을 달싹이고, 다음 장면에서는 그 노인 자신의 목소리로 1904년부터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 소설이 구조적으로 탁월한 이유는 이른바 프레임 내러티브(frame narrative) 방식을 쓰기 때문입니다. 프레임 내러티브란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액자처럼 중첩되는 서술 기법으로, 독자는 두 개의 시간대를 동시에 따라가게 됩니다. 현재인 1986년의 장면은 짧고 단속적으로 등장하고, 소설의 대부분은 1904년부터 시작하는 과거 서사가 채웁니다. 각 챕터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 이야기의 실마리를 살짝 흘리는 클리프행어(cliffhanger) 형식으로 마무리됩니다. 클리프행어란 이야기의 결말을 의도적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겨 독자의 궁금증을 다음 장으로 끌고 가는 기술입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이 연결 방식이 600페이지라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책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게 만드는 핵심이었습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차 세계대전부터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이탈리아 파시즘의 부상까지를 아우릅니다. 문학 연구에서 말하는 빌둥스로 만(Bildungsroman), 즉 주인공의 내면적 성장을 중심축으로 삼는 성장소설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역사적 사건을 촘촘하게 교직해 넣은 구성입니다. 1920~30년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이탈리아를 장악해 가는 과정이 주인공 미모의 조각 수주 과정과 맞물리는 방식은, 개인의 선택과 시대의 압력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성장서사의 핵심, 미모와 비올라의 관계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 줄여서 미모라고 불리는 주인공은 12살에 홀로 이탈리아 피에 달바 마을에 도착합니다.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고, 어머니는 가난을 이기지 못해 아이를 먼 친척 알베르토에게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미모는 사실상 노예에 가까운 대우를 받으며 석공 일을 배웁니다.
그러던 중 오르시니 귀족 가문의 지붕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막내딸 비올라와 처음 만납니다. 이후 무덤가에서 이어지는 비밀스러운 우정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관계의 시작점이 됩니다. 14살이 되던 해, 두 사람은 서로의 꿈을 향해 평생 응원하겠다고 맹세하고, 1928년 6월 24일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남깁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개발자로 커리어를 전환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비전공자로 Java를 독학하고, 이후 임베디드와 AI 분야까지 공부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가족의 응원이 없었다면 중간에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혼자 버티는 것과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봐 주는 것 사이의 차이는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소설의 성장서사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솔직히 짚고 싶습니다. 미모는 뛰어난 조각가로 성장하지만, 그 성장의 중요한 선택들이 대부분 비올라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결정됩니다. 예술가 개인의 독립적인 내적 고민, 즉 작품의 방향성이나 미적 철학에 대한 갈등이 비올라라는 외적 동인보다 더 전면에 나왔더라면 미모라는 인물이 한층 입체적으로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사랑을 중심 서사로 삼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예술가 미모의 내면이 일부 가려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소설에서 미모의 성장을 이끄는 구조적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타고난 조각 재능과 그것을 착취하는 환경 사이의 갈등
- 비올라와의 약속이 만들어내는 장기적 목표 의식
- 파시즘이라는 시대적 압력과 예술가로서의 생존 선택
- 자코메티, 브란쿠시 등 20세기 조각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과정
역사소설로서의 완성도, 그리고 영화화 가능성 전망
『그녀를 지키다』는 예술가 소설이자 러브스토리이면서 동시에 역사소설의 성격을 갖습니다. 소설에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세력을 키우던 1920~30년대 이탈리아의 사회상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미모의 선택지를 직접 제한하는 조건으로 작동합니다. 가톨릭 교회와 파시스트 정당, 두 권력으로부터 동시에 조각 수주를 받는 미모의 태도는 당시 예술가들이 정치적 압력 속에서 어떻게 생존 전략을 선택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적 구조이기도 합니다.
소설에는 실제 역사적 사건도 등장합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1972년 정신질환자에 의해 망치로 파손된 사건이 소설 속 핵심 장면으로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과 허구의 인물을 교차 배치하는 방식을 역사소설에서는 픽션 역사화(fictionalized history)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 직접 목격하거나 연루되는 형식으로, 독자가 역사를 더 생생하게 체험하게 만드는 기법입니다. 제가 직접 읽으면서 이 방식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느꼈는데, 역사 지식이 많지 않아도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시대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전달됩니다.
작가 장 바티스트 앙드레아는 원래 영화 감독 출신입니다. 46살에 소설가로 전업했고, 네 번째 작품인 이 소설로 공쿠르상을 수상했습니다. 소설이 영화보다 훨씬 높은 문학적 성취를 거둔 경우입니다. 실제로 영화화 작업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장면 하나하나가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이 감독 출신 작가의 특징인 듯합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는 이 소설의 진짜 가치는 영화가 담을 수 없는 밀도에 있습니다. 내면 묘사의 축적, 시간의 흐름을 문장으로 체감하는 방식, 그리고 80년이라는 세월이 만들어내는 서정성은 영상 매체가 압축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손실됩니다.
문학에서 서정성(lyricism)이란 이야기 자체보다 언어의 질감과 감정적 울림이 전면에 나오는 특성을 말합니다. 이 소설의 문장들은 사건을 전달하는 동시에 그 분위기를 내내 살려놓는데, 이것이 단순한 스토리텔링과 문학적 작품을 가르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역사 속 개인의 삶을 이렇게 밀도 있게 담아낸 소설은 최근 몇 년 사이 제가 읽은 것 중 가장 인상에 남습니다(출처: Prix Goncourt 공식 사이트).
소설의 공쿠르상 심사 기준에 대한 자료에 따르면, 수상 선정 과정에서 문장의 완성도와 서사적 독창성이 핵심 평가 요소로 작용합니다(출처: Académie Goncourt). 이 소설이 그 기준을 충족했다는 사실은 읽고 나면 납득이 됩니다.
600페이지라는 분량이 부담스럽다면, 비올라가 처음 등장하는 지점까지만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이후부터는 스스로 멈추기 어려워지는 지점이 올 것입니다. 저도 임베디드 공부를 병행하면서 짬짬이 읽었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한 챕터 한 챕터를 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소설은 천천히 읽을수록 더 깊이 들어오는 법이고, 『그녀를 지키다』가 바로 그런 작품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LyxjnkXw-F4&list=PLUpgTv3bu9rGxQBAMVaMvam27P0YbiY29&index=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