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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직접경험, 디지털기록, 기술활용)

_ming_racle 2026. 6. 3. 08:40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작년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는데 정작 기억에 남는 건 풍경이 아니라 어떤 사진이 더 잘 나왔는지였습니다. 바다 앞에서도 카메라 앱을 켜고 각도를 재고 있었던 거죠.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게 꽤 씁쓸하게 느껴졌습니다. 직접 경험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진단,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경험의 멸종

직접경험이 사라지는 시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직접 경험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직접 경험이란 특정 시간과 공간 안에서 몸과 감각을 가진 존재로서 실제로 겪는 체험을 말합니다. 책에서 읽거나 영상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말 그대로 "네가 거기 있었어야 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경험입니다.
흥미로운 데이터가 있습니다. 영어 표현 "You had to be there(네가 거기 있었어야 해)"의 사용 빈도를 빅데이터로 추적해 보니 1960년대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증가했다가 2012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2012년은 미국에서 스마트폰 보급률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해입니다. 우연이 아닌 것이죠.
직접 경험을 빠르게 대체하는 것은 온라인 간접 경험입니다. 대표적인 형태가 리액션 콘텐츠(reaction content)인데, 이는 음식을 먹거나 제품을 개봉하는 타인의 반응을 영상으로 소비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먹방, 언박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직접 먹고 직접 열어보는 경험을 영상 시청으로 대체하는 것이죠. 일각에서는 이를 경험 표절(experience plagiarism)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남의 경험을 내 것처럼 소비하는 행위입니다.
저도 개발자로 일하면서 이 부분을 체감한 적이 있습니다. 협업 과정에서 슬랙이나 화상회의만으로 해결하려다 며칠씩 엇갈렸던 경우가 있었는데, 결국 직접 만나 10분 얘기하고 끝났습니다. 비언어적 신호, 즉 표정이나 분위기 같은 것들이 텍스트로는 전달이 안 됐던 겁니다. 온라인 소통은 거짓말 장벽이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데, 텍스트 환경에서는 자신을 위장하거나 정보를 왜곡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디지털기록이 경험을 삼키는 방식

저는 요즘 맛집에 가면 음식이 나오는 순간 가장 먼저 하는 게 사진 촬영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이게 자동 반사가 됐는지도 모르겠고요.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업로드하기 위해 경험한다"는 표현, 처음 접했을 때 꽤 찔렸습니다.
이 현상은 개인 차원을 넘어 구조적인 문제로 연결됩니다. SNS 플랫폼 기업들은 개인의 경험을 콘텐츠로 전환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플랫폼 설계(platform design)란 사용자가 특정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도록 유도하는 서비스 구조를 뜻합니다. 좋아요 수, 조회수, 댓글 같은 수치가 사람들로 하여금 경험 자체보다 경험의 전시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죠.
기억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기억이 인스타그램, 틱톡 같은 외부 플랫폼에 저장되면서 기억의 통제권이 개인에서 대기업으로 넘어가는 상황이 됐습니다. 디지털 유산(digital legacy)이란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 온라인에 남는 모든 데이터와 콘텐츠를 말합니다. 이제는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실제 남겨지는 것은 그 사람이 올린 게시물과 계정, 즉 디지털 무덤이 전부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기억의 외주화가 심각해졌습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세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스마트폰을 잃는 것과 후각을 잃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질문에 53%가 후각 상실을 택했다고 합니다(출처: Pew Research Center). 후각은 기억과 감정을 자극하는 감각 중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보다 스마트폰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는 사실은 기술 의존도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잃는 것 중 하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의 가치입니다. 데카르트가 침대에서 천장의 파리를 보다 좌표 기하학의 아이디어를 얻었고, 아인슈타인은 전차 안에서 멍하니 시계탑을 바라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의 핵심을 떠올렸습니다. 이런 여백의 시간을 스마트폰이 완전히 채워버리면, 창의적인 사고가 싹틀 공간 자체가 없어집니다.

기술활용의 방향, 막는 것보다 올바르게 쓰는 것

기술을 비판하는 시각에는 타당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중학교 2학년 전까지 스마트폰을 주지 말아야 한다거나 온라인에 강한 규제를 해야 한다는 주장, 이해는 되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저는 인터넷과 온라인 강의를 통해 개발을 공부했고, 그게 커리어로 이어졌습니다. 오픈소스 커뮤니티에서 코드를 배우고, 스택오버플로우에서 밤새 문제를 해결했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 제가 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기술은 분명 기회를 만들어 줍니다.
중요한 건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란 디지털 기술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목적에 맞게 활용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단순히 스마트폰을 잘 쓰는 게 아니라, 언제 내려놓을지 아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기술을 잘 활용하기 위해 제가 실제로 신경 쓰는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밥 먹을 때는 스마트폰을 테이블에서 치운다
  • 여행 중 사진은 하루 최대 10장으로 제한한다
  • 화상회의로 며칠째 안 풀리는 문제는 바로 대면 미팅을 요청한다
  • 출퇴근 시간 중 10분은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안 한다

물론 편리함 뒤에 오는 불편함은 결국 본인이 감당해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는 게 불안하다면 그 불안을 직접 마주해야 하고, 대면 소통이 어색하다면 그 어색함도 직접 겪으면서 익혀야 합니다. 항상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디지털 미디어 사용 패턴과 청소년 정신건강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에서도, 기술 자체보다 사용 방식이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직접 경험을 완전히 되살리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경험을 위해 경험하는지, 기록을 위해 경험하는지 가끔 한 번씩 점검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작은 질문이 생각보다 꽤 많은 걸 바꿔줍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W8_53HmVKY